2010년 5월 15일 토요일

[j Story] “세상엔 연아·우즈식 성공이 있고 권율식 성공도 있다”

[중앙일보 김정욱.김진석.최훈] 7일 오후 5시(현지시간) 워싱턴DC 연방통신위원회(FCC) 건물 로비. 권율(35) 부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분도 안 돼 수염을 기른 훤칠한 청년이 웃는 낯으로 달려왔다. 기자가 보안절차를 마치는 동안 권율은 퇴근하는 동료들에게 일일이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TV 쇼 ‘서바이버’에서 우승해 상금 100만 달러를 거머쥔 몸짱, 뛰어난 머리를 가졌음이 틀림없는 스탠퍼드와 예일대 로스쿨 졸업생, 구글·맥킨지에 의회를 거쳐 오바마 캠프에까지 뛰어든 야심만만한 전략가. 이 모든 것을 한 줄로 꿰어 온 권율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세상에는 김연아, 타이거 우즈식 성공이 있고, 권율식 성공이 있다”는 그의 당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자의 기대감이 점점 커져갔다. 권율을 주목하라.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사진=김진석 기자

1 권율식 성공

한 우물 파는 것도 좋지만
다양한 경험 더 중요해 질 것


그는 역시 그랬다. 2006년 ‘피플’지가 올해 최고의 ‘섹시 가이’라고 뽑을 만했다. 키 1m85cm에 몸무게 70kg, 자신은 이제 망가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근육질 몸매였다.

● 권율 장군을 아나. 누가 이름을 지었나.

“안다. 어머니가 내 이름을 지으셨다. 그러나 조선시대 장군 이름에서 따온 건 아니다. 부모님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셨다. 아마 율 브리너의 ‘율’이 아닐까 짐작한다.”

● 사람들이 많이 알아볼 텐데 좋은가, 불편한가.

“이제 공무원이 돼서 양복을 입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잘 모른다. 간혹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거나 지저분하게 입고 다니면 ‘어, 서바이버!’라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좀 있다.(웃음) 그러는 게 많이 불편하다. 나는 본래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다.”

믿기가 어려웠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촬영할 때마다 그는 “불빛이 괜찮나요?” “장소가 좀 별로지요?”라고 오지랖 넓게 살폈다.

● 그럼 지금 모습은 변한 건가.

“어린 시절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스스로에게도 자신감이 없었다. 한국인이라는 배경도 자랑스럽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이대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수구· 트레킹·권투 등으로 몸을 다졌다. 오랜 세월이 필요했지만 나는 나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 체력과 두뇌, 리더십과 사교성을 겸비해야만 하는 복잡한 서바이버 게임에서 1등을 차지했다. 비결이 뭐였나.

“다양한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다. 서바이버 게임은 실제 정치 또는 사회생활과 비슷했다. 우승하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로펌에선 세밀하게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을 배웠고, 컨설팅 회사에선 큰 틀의 전략적 사고를 익혔다. 의회 일은 사람들을 한데 뭉치게 하는 거였다. 내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 상금 100만 달러는 만져봤나?

“상금의 승자는 항상 연방정부다.(웃음) 세금을 빼고 50만 달러를 받았다. 먼저 30%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나머지는 부모님도 드리고 투자도 했다.”(투자 결과를 살짝 물었더니 그는 ‘이익을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 당신 같은 학력과 경력이면 미국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는 게 어렵지 않을 텐데, 왜 늘 한국계·아시아계 이야기를 하는가.

“중·고교와 대학을 함께 다닌 중국계 친구가 대학 2학년 때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골수이식이 필요했다. 나부터 나섰다. 수혈이 가능한 아시아계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그들의 수는 매우 적었고, 비협조적이었다. 학교를 거의 그만두고 골수 기증자 찾기에 나섰지만 1년 만에 친구는 죽었다. 친구가 백인이었더라면 미국 주요 언론에서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결심했다. 혼자서만 갇혀 살던 이민 1세대들과는 달리 당당하게 남을 도우며 살아가겠다고. 서바이버 쇼에 나선 것도 내가 유명해지면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권율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 내 소수인종을 위한 골수기증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본인이 한 골수기증 횟수만 50회가 넘는다. 가족폭력 피해자를 위한 비영리 재단 활동도 돕고 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디피아’에서 그를 ‘박애주의자’라고 규정한 이유다.

권율의 사무실에는 책상 너머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조 바이든 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 당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었다.

● 오바마를 왜 밀었나.

“서바이버 우승 뒤 친구의 소개로 오바마를 두 번 만났다. 오바마는 매우 똑똑하면서도 재미있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소수인종의 한 사람으로 그가 피부색을 초월해 모든 사람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를 위해 뛰고 싶었다. 그래서 스탠퍼드에서 시카고, 그리고 예일까지 미 전역의 대학을 돌며 오바마 지지를 호소하고 다녔다.”

● FCC 부국장 자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맡았나. 하는 일은.(FCC 는 미국의 유·무선 통신, 국제통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을 가진 미 연방정부의 핵심 권력기관이다.)

“대선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오바마의 하버드 로스쿨 동창인 줄리어스 제나초우스키를 만난 이후 그는 나의 친구이자 멘토가 됐다. 오바마가 대통령 당선 후 줄리어스를 FCC 위원장에 지명했고, 줄리어스는 내게 함께 일하자고 했다. 새로운 법이나 규정을 통해 소비자 보호를 강화하고, 이와 관련된 새로운 정책 목표를 위원장에게 제시하는 게 내 역할이다.”

● 2008년 캘리포니아주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하려 했다고 들었다.

“그 지역 톰 랜토스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 주변 동료들이 나를 격려했다. 주목받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론 늘 선출직 공직에 한국계가 더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텍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이 났을 때나 LPGA(여자프로골프협회)에서 영어만 사용해야 한다고 했을 때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리더가 없었다. 그래서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나는 내 학력과 경력이 그 자리에 적합할 수 있다고 봤지만 사람들은 서바이버 우승자라는 점만 부각시켰다. 또 당시 나는 지금의 아내 소피와 데이트 중이었다.”(웃음)

● 지금은 어떤가, FCC 부국장 자리가 공직의 끝은 아닐 텐데.

“확고한 그림은 없다. 그러나 선출직 공직은 좋은 아버지와 남편이 되려는 내 희망과 양립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임명직 공직에서 계속해서 꿈을 이어가고 싶다. 희망을 말한다면 한국계 최초의 내각 멤버(장관)는 어떤가. 나는 한국 문화와 한국 사회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미국 사회의 리더로 성장해 한국 사회와 한국계 미국 사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

● 최초의 한국계 미국 대통령은 어떤가.

“한국계 미국 대통령의 탄생을 보는 일은 정말 흥분될 거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사실 미국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고 싶다. 사물을 전체적으로 폭넓게 파악하는 시각, 정치적 감각, 법률적 지식, 사람들과의 소통 능력 등을 감안하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같다.”

● 리더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은 .

“지혜, 자신감, 성숙함, 결단력, 강인함, 카리스마. 리더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철저한 자기 인식이다. 나는 훌륭한 리더들에게서 예외 없이 끊임없는 자기 평가와 자기 개선 노력을 지켜봤다. 둘째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이해심이다. 나는 매우 똑똑하고 야심찬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북돋워주는 능력이 있었다.”

●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조언해 줄 말이 있는가.

“이 세상에는 김연아나 타이거 우즈식 성공이 있다. 좁고 깊게 한 우물을 파는 방식이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경험해서 실력을 쌓아가는 권율식 성공도 있다. 아버지께서 ‘나는 30년 동안 한 회사를 다녔는데 너는 왜 그렇게 자주 옮기냐’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다양한 각도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갈수록 더욱 더 긴요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워싱턴 DC의 의사당 건물을 바라보며 걷다가 그에게 “지금까지 가장 뼈아픈 실수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어, 많죠”라고 말할 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예상대로였다. 권율은 놀라울 정도의 절제력으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다.

2 리더십 비결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3 가족과 사랑
TV속 나를 보고 혹시 게이?
그렇게 물은 그녀와 사랑했다


권율은 1975년 한인들이 많이 사는 뉴욕 퀸스 플러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아버지 권영현(70)씨가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캘리포니아주의 석유 회사에 직장을 갖게 되면서 여섯 살의 권율도 함께 LA로 옮겼다.

다섯 살 위의 형 폴(한국이름 섭)도 스탠퍼드대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을 나온 실력파다. 두 형제는 모두 하버드대에도 합격했으나, 스탠퍼드가 보다 창의적인 곳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 부모님이 어떻게 키운 건가.

“아버지와 어머니(소선·66)는 깊은 사랑으로 우리들을 키웠지만 스타일은 정반대였다. ‘군기반장’ 아버지는 자식들이 공부에 집중해서 학교 성적이 뛰어나도록 밀어붙였다. 늘 내 학년보다 3년이나 앞선 교과서를 사들고 오셨다. 반면 어머니는 누구에게든 자상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아버지에게는 규율·집중·근면을, 어머니에게는 타인과의 따뜻한 교감을 배웠다.”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9월 첫 출산을 앞둔 아름다운 부인 소피 탄(32)을 만났다.

소피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권율이 전한 러브스토리는 한 편의 시티콤이다. “아시아계 친구 브래드가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고 서바이버 프로그램을 봤다. 당시 내가 가장 멋지게 나올 때였다. TV를 보던 소피는 ‘저 사람도 동성연애자냐’고 물었다. 브래드가 동성연애자였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하자 소피는 농담 삼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수주 후 우리는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권율은 “외모만큼이나 소피의 마음이 아름다웠다”며 “서바이버 출연 후 만난 어떤 여자들과 달리 소피는 명성과 돈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UC 버클리대를 나온 소피는 미 연방 보건복지부에서 소수인종의 건강지원 업무를 맡고 있다.

4 서바이버 도전기

한인도 리더 될 수 있다는걸
미국에 보여주고 싶었다


2006년 12월 뉴질랜드의 쿡 아일랜드 섬. 미국 CBS방송 ‘서바이버(Survivor)’ 쇼의 배심원 9명이 우승자 선발을 앞두고 권율씨에게 ‘최후의 변(辯)’을 주문했다. “어릴 적부터 TV 속의 황인종은 늘 웃음거리로 그려졌어요. 난 승자가 되면 아시아인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권씨의 발언에 출연자들은 숙연해졌다. 이윽고 진행자가 쪽지를 폈다. 우승자 ‘권율’. 복받치는 감격에 권씨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는 맞수인 히스패닉계 웨이터인 오스카 오지 루스와 박빙의 승부 끝에 배심원 투표에서 5대4로 ‘최후의 월계관’을 거머쥐었다.

이 게임은 ‘인종 대결’로도 불렸다. 아시아·백인·흑인·라틴계가 5명씩 부족을 이뤄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만 들고 39일간의 생존 싸움에 뛰어들었다. 권씨가 속한 푸카 부족은 한국계 이설희(변호사)씨와 필리핀·베트남계 등으로 이뤄졌다.

20명의 출연진은 5만 명의 지원자에서 인터뷰와 체력·심리 검사를 거쳐 뽑혔다. 의대생·부동산업자·경찰·영업사원 등이 망라됐다. 참가자들은 통나무 매달리기부터 불 피우기, 퍼즐 풀기까지 체력과 지략을 요구하는 게임을 치렀다. 패배하면 팀원이 하나둘 탈락하면서 ‘최후의 1인’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상대를 떨어뜨리고 내가 남아야 하는 게임. 승패는 인간관계가 좌우한다. 권씨는 j와의 인터뷰에서 “저의 기본 전략은 출연자들과의 감정이입을 통해 친밀한 신뢰를 쌓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리더십 뿌리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출연자들이 제게 조언을 구하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정보를 얻게 됐고 사람들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지요.”

권씨는 그간 닦아 온 ‘지식 내공’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수많은 게임 이론과 수학적 방법도 구사했어요. 대학교에서 게임이론과 언어학·수학·사회심리학을 배웠고, 우리 팀이 앞서갈 최선의 전략은 어떤 것인지 계산을 했지요. 종이나 연필이 없어 머릿속으로 답을 구하느라 여러 날 밤을 지새워야 했고요.”

쇼가 끝난 뒤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권씨를 초청해 지난 3년간 요원들에게 사람들과 어떻게 교감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가르치게 했다.

권씨는 “당시 친구 한 명이 아시아계 미국인의 전형을 찾던 서바이버 프로듀서에게 저를 추천했어요. 그런데 그 전형이란 게 뭔지 아세요?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쿵후에 미친 사람이거나, 공부만 죽어라고 하는 괴짜였어요. 인터뷰를 했더니 후자처럼 보이라고 양복 입고 안경을 쓰라는 거예요.”

그런데도 출연키로 마음을 굳힌 이유는 뭘까. 권씨는 “오히려 그래서 나간 거예요. 그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아시아계 미국인들, 특히 한국계 미국인들이 얼간이나 괴짜만 있는 게 아니라 남과 협력할 줄도 알고, 특히 남을 리드할 줄 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

From j

2호의 프런트 페이지를 장식한 권율씨는 참 반듯한 사람이었습니다. j팀의 박현영 기자가 그와 사전에 수차례의 연락 e-메일을 주고 받았지요. 권율씨는 박 기자를 남자로 지레 짐작했는지 줄곧 ‘Dear Mr. Park’으로 호칭했습니다. 박 기자가 추후 “난 여기자”라고 말해주자 그가 이런 e-메일을 보내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저도 이런 적이 있어요. 미국 사람들은 제 이름인 ‘율(Yul)’에 익숙지 않아 때때로 제게 ‘Ms. Kwon’이나 ‘Mrs. Kwon’이라고 편지를 보내옵니다. 글쎄 제 사진이 붙어 있는 버지니아 운전면허증에까지 ‘여성(Female)’이라고 기재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면허 따러 가던 날 원피스를 입고 갔었나 봅니다.” 성의 있는 대응과 설명, 유머에 그가 리더십의 게임인 서바이버에서 우승한 까닭을 짐작했습니다. 그에게서 사람에 대한 ‘정성’을 배웁니다.

가수 조용필씨와의 1시간 30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난 뒤 박종근 사진기자가 별도의 사진 촬영을 요청했습니다. 윗옷을 벗어젖힌 조용필씨가 연습실로 가더니 실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30분간의 추가 촬영이 끝난 뒤 4, 5면에 걸친 ‘작품’ 사진이 탄생했습니다. 지켜보던 저도 힘든 터에 보여준 거장 조용필씨의 ‘겸손’과 ‘열정’에서 다시 배웠습니다. ‘열정’과 ‘정성’, 그리고 ‘겸손’으로 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참 는 중앙일보의 영문 머리글자 j를 토요일 편히 쉬는 사람 모습으로 디자인한 것입니다.

최훈 중앙일보 j 에디터

2010년 5월 8일 토요일

잠실 야구장 예매 Tip

2. 티켓가격

 

< 엘지 경기 >

 

< 두산 경기 >

 

 

 

 3. 예매

 

좌석별 특성

 

 < 중앙석 >

진골 아니면 앉기 힘들다.

보통 기자, 연예인, 선수들의 가족, 기업 접대용으로 팔리므로 평민들은 표 구경하기도 힘들다.

경호원도 지키고 있다눈....

 

 < 테이블석(일명 끌레도르/로티보이석) >

요긴 가족들끼리 도시락 싸서 가믄 좋다.  

장내 정리하는 시간에 두산 경기때 끌레도르 아이스크림 제공.

너무 조용해서 응원하기 뻘쭘하다는 단점이....

 

 < 블루 지정석 >

편안하고 조용하고 진지하고 실감나게 야구를 보고싶을 때 110, 212 / 113, 215 추천.

앞줄 가운데(107~109 / 114~116) 앉으면 덕아웃 들락거리는 선수들을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다.

대신 티켓 오픈시간 잘 봐뒀다가 컴터 앞에 딱 대기하고 광클 필수~!!

 

 < 레드 지정석 >

보통 일반 야구 광팬들이 제일 선호하는 자리.

105, 106/ 117, 118은 선수들이 잘 보이고 파울볼 득템 유리.

응원단상 바로 앞자리 206,207 / 220, 221은 어마어마한 혜택이...

이벤트, TV 출연, 키스타임, 치어리더 언냐와의 혼연일체 익사이팅한 응원 분위기....

난 치어리더들이 시야를 가려서 별로 안좋아하지만

골팬들이 제일 선호하고 동호회 단관도 자주 있어서 여기도 광클 필수!

 

 < 내야석 >

중앙석 바로 뒤나 206,207 / 220, 221 바로 뒷쪽 자리는 레드 지정석 보다 나을수도 있다. 가격대비 만족도 최고!!

하지만 선착순이어서 인기있는 경기는 최소 2~3시간 전에 가서 달리기 잘해야 좋은데 앉을 수 있다.

기다리기 매우 지루하고 배고프므로 먹을거 제일 많이 싸가야 하고, 돗자리와 고스톱/카드도 빛나는 아이템 -_ㅡ#

 

 < 외야석 >

솔직히 야구 잘 안보인다.

보통 잿밥에 관심 많은 분들이 가는 곳.... 파울볼, 홈런볼이 제일 많이 날아가는 자리....

라이트 기둥 아래는 늘 신문지 깔고 술판 벌이는 아저씨들 꼭 있다.

 

http://blog.naver.com/02minjoo?Redirect=Log&logNo=110066880277

2010년 5월 5일 수요일

르네마그리트


열린문화 > 마음미술관 > 이건 파이프가 아니다 -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출처 : www.amind.co.kr



비폭력유목민 :: 르네 마그리트 - Connivance

이미지출처 : luminal.pe.kr



리버룸님의 블로그

이미지출처 : blog.joins.com



해피포터의 행복한 프로그래밍 : 르네 마그리트 탄생 11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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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 르네 마그리트, 개인적 가치, 1952

이미지출처 : lepremiermai.tistory.com



찾지말고 통 하자!

이미지출처 : tong.nate.com



whatis___title :: 낯익은 것들의 낯설음 -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출처 : blog.jinbo.net


http://blog.naver.com/k07yhss/140101685100

"Life obliges me to do something, so I paint."
"인생은 내게 무언가 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린다"

"Art evokes the mystery without which the world would not exist."
"예술은 미스터리를 만들어낸다. 미스터리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My painting is visible images which conceal nothing;
they evoke mystery and, indeed, when one sees one of my pictures,
one asks oneself this simple question 'What does that mean'?
It does not mean anything, because mystery means nothing either, it is unknowable."
"내 작품들은 아무런 상징도 없는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은 미스터리를 만들어내고, 그렇기에 누군가가 내 그림을 한 점 본다면
'이게 무슨 의미지? 하고 물을 것이다. 그건(내 작품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미스터리 도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알 수 없을 뿐이다."

"Everything we wee hides another thing,
we always want to see what is hidden by what we see."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보고 싶어한다."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삼성도 그만두고 간다는 신의 직장

거래소 평균 연봉 1억…대학교직원 갈수록 인기
공공기관 보수가 전체적으로 다소 줄었다지만, 몇몇 기관들은 여전히 `신의 직장`이었다. 한국거래소는 직원 평균 연봉이 1억원을 넘어서며 공공기관 중 가장 높았고 기관장 연봉도 2위와 큰 격차를 보이며 1위를 차지했다.

직원 평균 연봉은 한국거래소(1억608만원)에 이어 한국투자공사(9,795만원) 코스콤(9,380만원) 한국예탁결제원(9,311만원) 등 금융 공기업이 상위 1~4위를 휩쓸었다. 특히 한국투자공사 직원들은 지난해 처음 성과급을 받으며 연봉 증가율이 42%에 달했다.

2008년 연봉 1위였던 한국산업은행은 3.5% 줄어든 8,943만원으로 6위에 머물렀다. 한국전기연구원(9,183만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8,453만원) 한국원자력연구원(8,364만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8,317만원) 등 연구기관들도 상위권에 포진했다.

기관장 연봉에서는 한국거래소가 2008년보다 19.2% 줄었으나 6억4,844만원으로 여전히 1위였고, 한국수출입은행(4억8,444억원) 중소기업은행(4억8,394억원) 한국투자공사(4억6,748억원) 한국산업은행(4억6,190억원) 등의 순이었다.

최근에는 공기업보다 `한수 위`인 직장으로 대학 교직원이 떠오르고 있다.

정년 보장(57~62세)과 퇴직 후 사학연금, 방학 중 단축근무, 대학원 진학 혜택 등 안정적이면서 자기계발과 노후보장이 된다는 장점 때문에 `신(神)도 모르는 직장`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초봉도 3500만~4000만원 수준으로 웬만한 대기업 못지 않다.

이 때문에 대학 교직원은 채용 경쟁률이 수백대 1에 달한다. 연세대가 작년 10월에 실시한 교직원 채용에는 3명 모집에 900명(300대1)이 지원했고 한양대도 2008년 3월 교직원 4명을 채용하는데 1234명(309대1)이 지원했다. 서울대도 지난해 교직원 1명 뽑는데 209명이 몰렸다.

대학 교직원은 특히 잦은 야근과 격무에 시달리면서 정년 보장도 안 되는 다른 직장인들 사이에서 이직(移職)을 원하는 직장 1순위이기도 하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직원인 김 모씨(32)는 대학 졸업 후 삼성에 입사했지만 2년 만에 그만두고 교직원이 됐다.

[김용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