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0일 일요일

결혼 전, 싫더라도 꼭 기억해야 할 두 가지는?

내 사랑의 대가를 요구 말라…서로 다름을 인정하라
<스님의 주례사>, 결혼에 대해 고민하는 청춘에 조언
한겨레 조현 기자기자블로그
» <스님의 주례사>
‘결혼은 포위된 요새이다. 밖에 있는 자들은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고, 안에 있는 자들은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중국 속담)

‘많은 여자들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 때문에 제정신을 잃는다는 것. 그러니까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다.’(셰어)

누구와 결혼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고 나면 청혼했을 당시의 그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람과 함께 살게 되는 까닭에.’(조안 헨리에타 콜린스)

‘제짝이 나타날 때까지 결혼은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소녀들은 중고차를 고를 때보다 더 소홀하게 남편감을 고른다.’(헨리 루이스 맨켄)

‘사랑을 길들이려는 시도를 하는 결혼은 이혼을 내포하고 있다.’(프란츠 블라이)

‘결혼생활에서 로맨틱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부는 결혼하기 전처럼 살아야한다. 그러니까 따로 사는 것이 최고이다.’(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나는 결혼한 여왕이 되느니 차라리 결혼하지 않은 거지가 더 좋다. 결혼반지는 나에게 멍에와 마찬가지이니까.’(엘리자베스 1세 여왕)

‘기혼자들은 결혼했다는 그 멍청함에 대한 벌로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한다.’(귀스타브 플로베르)


‘영국의 한 판사가 해결되지 않은 배우자 살해 사건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결혼생활 그 자체가 바로 동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살해 동기를 찾을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매리 호팅어)

‘어떤 부부는 특별히 연기를 잘 하기 때문에 사이가 좋은 부부로 간주된다.’(바네사 레드그레이브)

‘행복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결혼을 해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무 늦다.’(피터 셀러스)

‘부부는 하늘이 맺어주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신은 그와 같은 부당한 일을 저지르지 않을 테니까.’(마가렛 폰 발로아)

‘결혼식에서 연주되는 음악을 들으면 나는 항상 군인들이 전쟁터로 나갈 때 연주되는 음악이 생각난다.’(하인리히 하이네)

법륜 스님이 쓴 <스님의 주례사>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것은 싱글족들이 늘어가고 있음에도 결혼에 대한 청춘남녀들의 관심이 지대하다는 얘기겠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위트명언사전(북로드 펴냄)의 결혼편을 살펴보았다. 현자들은 거기에 대해 어떻게 말했을까. 그런데 놀랍다. 위 글들의 대부분은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된장을 안담글 것인가’

이것이 청춘 남녀들이 고민이렷다. 데이트 커플 가운데 더 콩깍지가 강력히 씌인 쪽은 ‘그건 다 공부만 하느라고 결혼은 재미없었던 철학자들이나 결혼에 실패한 이들의 농간”이라며 달콤한 초콜릿을 내밀겠지만, 과연 그럴 것인가. 자고로 아름다워보이는 야생화가 독이나 가시를 감추고 있기 십상이고, 달콤하게 유혹하는 것일수록 독성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니.

하지만 그렇게 골치 아프지 않은 논리 없이 그냥 그렇게 잘 살아가는 부부들도 이 세상에는 많다. 그러니 평범하고 당연한 것만큼 위대한 것도 없는 법이다. 남들 사는 만큼 살아가는 것이 그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그만큼 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꿈은 또 얼마나 대단한가. 그것이 남들만큼 살아가기 어려운 이유다. 많은 이들이 젊은 날의 로맨스가 한평생 계속되기를 바란다. 서로 모든 게 찰떡처럼 잘 맞아 떨어지기를 바라는데서 나아가, 속내는 여자는 남자가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다면 잘 살아갈터이니 그다지 조언도 필요없겠지만,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얘기는 다르다.

법륜 스님이 <스님의 주례사>에서 기억하기 싫더라도 결혼 전에 기억해야할 두가지로 든 것은 다음과 같다.

1.내가 사랑하고 내가 좋아할 뿐이지 상대에게 대가를 요구하면 안된다. 내가 이만큼 좋아하니 너도 이만큼 좋아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에게는 사랑할 권리는 있지만 그 대가로 사랑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 결혼하는 사람들이 사랑받을 권리가 있다고 흔히 착각하기 때문에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하다. 단지 내가 사랑할 뿐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지, 내가 요구할 수 있는게 아니다. 다만 그를 좋아하고 사랑하니 내가 행복한 것이다. 행복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 누군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만나 장사를 하고 거래를 하지만 부부지간에는 장사를 하거나, 이해득실을 따져서는 안된다. 그럴 때 비로소 진정한 부부가 된다.

2.안 맞는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해야 한다. 부부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고 성별도 다른데 어떻게 다 맞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출발할 때는 양쪽이 맞는 건 10퍼센트고 안 맞는 게 90퍼센트에서 출발해서 점차 공통분모를 늘려가면 된다.

한국 구단이 외면한 ‘퇴물’ 600만 불의 사나이로 부활


30만 달러(약 3억5000만원)였던 연봉이 스무 배 이상 뛸 전망이다. 국내에서 버림받은 투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와 일본 빅마켓 구단으로부터 뜨거운 러브콜을 받고 있다. 일본 야쿠르트에서 뛰고 있는 임창용(34) 얘기다.

임창용은 올 시즌 53경기에 등판, 1승2패35세이브 평균자책점 1.46을 기록했다. 센트럴리그 구원 2위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최고 마무리라고 해도 손색없다. 이와세 히토키(36·주니치)가 42세이브를 올렸지만 리그 1위 구단에 속한 덕분에 세이브 기회가 많았을 뿐이다. 이와세의 평균자책점은 2.25로 임창용에게 뒤진다.

 

올겨울이면 자유계약선수

미국과 일본 구단들은 그를 가만히 놔둘 것 같지 않다. 매력적인 마무리투수를 얻기 위해 올여름부터 뜨거운 정보전이 펼쳐졌다. 12월 스토브리그에선 그를 둘러싸고 한바탕 머니게임이 펼쳐질 전망이다.

8월 3일 주니치와의 도쿄 홈경기. 이날 진구구장에는 20명이 넘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본부석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텍사스, 샌프란시스코, 뉴욕 메츠, 미네소타, 시카고 컵스, 토론토 구단 등 메이저리그에서 파견한 이들이었다. 3-2로 앞선 9회 초 임창용이 마운드에 오르자 스카우트들은 말을 멈췄다. 그리고 스피드건과 자료집을 꺼내 들고 그에 대한 스카우팅 리포트를 작성했다. 임창용은 올겨울 어느 팀과도 계약할 수 있는 FA(프리에이전트: 자유계약선수)가 된다.

임창용의 쇼케이스는 완벽했다. 삼진 2개를 포함해 삼자범퇴로 주니치 강타선을 깔끔하게 막아내며 세이브를 따냈다. 현재 일본에서 뛰고 있는 선수 중에서 임창용만큼 메이저리그 구단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 선수는 없다. 미국 스카우트들은 지난해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때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예상 몸값도 흘러나왔다. 메이저리그에서 셋업맨이나 마무리로 뛸 수 있는 만큼 연봉 500만~600만 달러(약 60억~72억원) 기준으로 2~3년 계약이 가능하다는 전망이다. 일본 구단도 바빠졌다. 최고의 인기와 자금력을 자랑하는 요미우리를 비롯해 한신과 주니치 등 명문 팀들이 임창용 쟁탈전에 뛰어들 태세다.

특히 요미우리는 임창용을 가장 탐낼 구단으로 꼽힌다. 지난 6일자 석간후지에는 부상과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마크 크룬(25세이브, 평균자책점 4.26)을 내보내고 임창용을 영입할 것이라는 추측 기사가 나왔다. 요미우리는 2006년 41홈런을 때린 이승엽과 이듬해부터 4년 총액 30억 엔(연평균 7억5000만 엔·약 105억원)에 계약했다. 임창용의 시장가치는 4년 전 이승엽에 비해 떨어질 것이 없다.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는다면 연봉 6억~7억 엔(약 84억~98억원) 규모의 계약을 기대할 수 있는 이유다.

주니치도 노쇠해가는 이와세 후임으로 임창용을 생각하고 있다. 한신은 후자카와 규지(28세이브, 평균자책점 2.01)가 미국 진출을 노리고 있어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다. 이와세(연봉 4억3000만 엔·약 60억원)와 후지카와(4억 엔·약 56억원)는 올해 센트럴리그 투수 연봉 1, 2위 선수다. 일본은 마무리투수를 후하게 대접하고 있기 때문에 임창용이 시장에 나올 경우 연봉 5억 엔(약 70억원)에서부터 줄다리기가 시작될 전망이다.

미국·일본 어디로 가든 임창용의 연봉은 한화로 60억원을 쉽게 넘을 것이다. 그가 2008년 야쿠르트에 입단했을 때 연봉은 30만 달러였다. 약체 팀에서 뛰면서도 2년간 61세이브를 거뒀지만 3년 계약에 묶여 2009년 연봉 50만 달러(약 6억원), 올해 160만 달러(약 22억원)에 그쳤다. 11월 말 계약이 끝나면 그의 가치가 제대로 반영될 것이다.

 

신무기 개발로 일본 현미경 야구 압도

임창용이 삼성에서 뛰었던 2007년 겨울 선동열 삼성 감독은 그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놨다. 2005년 말 오른쪽 팔꿈치 수술을 받은 임창용이 재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른 국내 구단들은 임창용을 데려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의 커리어는 탐났지만 미래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트레이드가 지지부진한 틈을 타 임창용은 일본 야쿠르트와 계약했다. 삼성에서 받았던 연봉 5억원보다 적은 돈을 받고도 미련 없이 떠났다.

임창용

임창용은 2005년 삼성과 재계약할 때 ‘해외 진출을 원하면 허락하겠다’는 조항을 넣었다. 삼성 구단은 임창용의 전성기가 2004년(36세이브, 평균자책점 2.01) 끝난 것으로 판단했다. 사인할 때만 해도 실현 가능성이 0에 가까운 항목이었다.

실제 임창용은 추락했다. 2005년 선발로 복귀했지만 팔꿈치가 아픈 탓에 구속이 떨어졌다. 150㎞를 쉽게 넘던 구속이 140㎞ 초·중반으로 떨어지며 3년간 11승15패에 그쳤다.

지금까지 한국 선수들은 최전성기에 일본에 진출했어도 대부분 실패했다. ‘국보투수’ 선동열(1995년 주니치), ‘국민타자’ 이승엽(2004년 지바 롯데)도 첫해엔 거의 2군에 머물렀다. 그러나 국내에서 퇴물로 취급받던 임창용이 일본에서 성공했다. 2008년 개막전부터 최고 구속 156㎞ 강속구를 토해내며 33세이브(평균자책점 3.00)를 따냈다. 2009년엔 28세이브(2.05)를 올렸다. 지난해엔 최고 스피드 160㎞를 찍어 일본 역대 2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임창용은 3년간 강력하면서도 안정된 피칭을 했다. 상대를 해부하다시피 분석하는 일본 야구도 그를 당해내지 못하고 있다. 일본 타자들의 연구보다 임창용의 발전이 더 빨랐다.

2008년 임창용의 무기는 빠른 공이었다. 팔꿈치 부상 재발을 걱정하지 않고 힘차게 공을 뿌렸다. 아프기 전 같은 강속구가 살아났다.

2009년엔 포크볼을 선보였다. 그해 3월 WBC 결승전에서 일본 대표팀 스즈키 이치로(시애틀)를 향해 던지다 결승타를 얻어맞았던 그 공이다. 그러나 임창용은 두려워하지 않고 포크볼 구사 비중을 높였다. 직구를 기다리던 타자들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올해에는 더 진화했다. 공의 스피드보다는 회전력을 높이는 고급 피칭을 하고 있다. 구속이 다소 줄어든 대신 투구가 포수 미트에 박힐 때까지 살아 들어왔다. 리그 최고의 강속구에 날카로운 변화구를 보강했고, 공의 움직임까지 좋아진 임창용은 완벽한 마무리투수에 가까워졌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임창용은 다시 뛰어올랐다. 30대 임창용의 가치는 20대 임창용의 가치보다 열 배 이상 높아졌다.

임창용의 성공은 실패로부터 비롯됐다. 하루의 실패도 1년의 패배도 모두 그랬다. 그는 “실패는 마무리투수의 숙명이다. 모든 경기를 다 이길 수는 없다. 패배를 깨끗하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패배 인정해야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

‘실패 망각증’이 성공을 부른다는 의미다. 실패 자체를 잊기보다는 실패 후유증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임창용은 강속구로 성공했지만 강속구를 잃고 무너졌다. 수술 후 두려움을 떨쳐내고 다시 전력으로 던졌다. 포크볼을 던져 뼈아픈 안타를 맞았지만, 용기를 잃지 않았다.

해태 시절 임창용은 실패를 몰랐다. 21세이던 1997년 주전 마무리로 도약해 26세이브(구원 2위)를 올렸다. 98년에는 8승7패34세이브로 구원왕(42세이브포인트)에 올랐으며 평균자책점 1.89였다. 가운데 직구만 던져도 타자들은 당해내지 못했다. 99년 삼성으로 이적해서는 마무리이면서 평균자책점 1위(2.14)를 차지했다.

선발로도 역시 최강이었다. 선발 첫해인 2001년 14승(다승 공동 3위) 6패 평균자책점 3.90, 2002년 17승(3위) 6패 평균자책점 3.08, 2003년 13승(공동 3위) 3패 평균자책점 3.55를 기록했다. 2004년 다시 마무리로 복귀하자마자 구원왕(36세이브)을 따냈다.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임창용처럼 성공한 투수는 해태 시절 선동열 외에는 없었다.

결정타를 맞더라도 툭 털어버리는 담담함 혹은 뻔뻔함으로 실패를 견뎌냈다. 뒤돌아보면 걸음이 느려지기 때문에 앞을 향해 또박또박 걸어왔다.

임창용은 조만간 귀국할 예정이다. 그는 “조용히 지낼 테니 찾지 마라”며 나지막하게 웃었다. 성공했다고 어깨에 힘을 줄 생각 같은 건 없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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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 15일 토요일

[j Story] “세상엔 연아·우즈식 성공이 있고 권율식 성공도 있다”

[중앙일보 김정욱.김진석.최훈] 7일 오후 5시(현지시간) 워싱턴DC 연방통신위원회(FCC) 건물 로비. 권율(35) 부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분도 안 돼 수염을 기른 훤칠한 청년이 웃는 낯으로 달려왔다. 기자가 보안절차를 마치는 동안 권율은 퇴근하는 동료들에게 일일이 “주말 잘 보내라”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TV 쇼 ‘서바이버’에서 우승해 상금 100만 달러를 거머쥔 몸짱, 뛰어난 머리를 가졌음이 틀림없는 스탠퍼드와 예일대 로스쿨 졸업생, 구글·맥킨지에 의회를 거쳐 오바마 캠프에까지 뛰어든 야심만만한 전략가. 이 모든 것을 한 줄로 꿰어 온 권율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세상에는 김연아, 타이거 우즈식 성공이 있고, 권율식 성공이 있다”는 그의 당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자의 기대감이 점점 커져갔다. 권율을 주목하라.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사진=김진석 기자

1 권율식 성공

한 우물 파는 것도 좋지만
다양한 경험 더 중요해 질 것


그는 역시 그랬다. 2006년 ‘피플’지가 올해 최고의 ‘섹시 가이’라고 뽑을 만했다. 키 1m85cm에 몸무게 70kg, 자신은 이제 망가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군더더기 하나 없는 근육질 몸매였다.

● 권율 장군을 아나. 누가 이름을 지었나.

“안다. 어머니가 내 이름을 지으셨다. 그러나 조선시대 장군 이름에서 따온 건 아니다. 부모님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셨다. 아마 율 브리너의 ‘율’이 아닐까 짐작한다.”

● 사람들이 많이 알아볼 텐데 좋은가, 불편한가.

“이제 공무원이 돼서 양복을 입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잘 모른다. 간혹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거나 지저분하게 입고 다니면 ‘어, 서바이버!’라고 알아보는 사람들이 좀 있다.(웃음) 그러는 게 많이 불편하다. 나는 본래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다.”

믿기가 어려웠다. 동행한 사진기자가 촬영할 때마다 그는 “불빛이 괜찮나요?” “장소가 좀 별로지요?”라고 오지랖 넓게 살폈다.

● 그럼 지금 모습은 변한 건가.

“어린 시절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다. 스스로에게도 자신감이 없었다. 한국인이라는 배경도 자랑스럽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이대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고, 수구· 트레킹·권투 등으로 몸을 다졌다. 오랜 세월이 필요했지만 나는 나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 체력과 두뇌, 리더십과 사교성을 겸비해야만 하는 복잡한 서바이버 게임에서 1등을 차지했다. 비결이 뭐였나.

“다양한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다. 서바이버 게임은 실제 정치 또는 사회생활과 비슷했다. 우승하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로펌에선 세밀하게 사람을 설득하는 능력을 배웠고, 컨설팅 회사에선 큰 틀의 전략적 사고를 익혔다. 의회 일은 사람들을 한데 뭉치게 하는 거였다. 내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 상금 100만 달러는 만져봤나?

“상금의 승자는 항상 연방정부다.(웃음) 세금을 빼고 50만 달러를 받았다. 먼저 30%를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나머지는 부모님도 드리고 투자도 했다.”(투자 결과를 살짝 물었더니 그는 ‘이익을 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 당신 같은 학력과 경력이면 미국 사회의 주류에 편입되는 게 어렵지 않을 텐데, 왜 늘 한국계·아시아계 이야기를 하는가.

“중·고교와 대학을 함께 다닌 중국계 친구가 대학 2학년 때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골수이식이 필요했다. 나부터 나섰다. 수혈이 가능한 아시아계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그들의 수는 매우 적었고, 비협조적이었다. 학교를 거의 그만두고 골수 기증자 찾기에 나섰지만 1년 만에 친구는 죽었다. 친구가 백인이었더라면 미국 주요 언론에서 이렇게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결심했다. 혼자서만 갇혀 살던 이민 1세대들과는 달리 당당하게 남을 도우며 살아가겠다고. 서바이버 쇼에 나선 것도 내가 유명해지면 좋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권율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국 내 소수인종을 위한 골수기증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본인이 한 골수기증 횟수만 50회가 넘는다. 가족폭력 피해자를 위한 비영리 재단 활동도 돕고 있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디피아’에서 그를 ‘박애주의자’라고 규정한 이유다.

권율의 사무실에는 책상 너머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조 바이든 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 당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었다.

● 오바마를 왜 밀었나.

“서바이버 우승 뒤 친구의 소개로 오바마를 두 번 만났다. 오바마는 매우 똑똑하면서도 재미있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소수인종의 한 사람으로 그가 피부색을 초월해 모든 사람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를 위해 뛰고 싶었다. 그래서 스탠퍼드에서 시카고, 그리고 예일까지 미 전역의 대학을 돌며 오바마 지지를 호소하고 다녔다.”

● FCC 부국장 자리는 어떤 과정을 통해 맡았나. 하는 일은.(FCC 는 미국의 유·무선 통신, 국제통신 사업을 총괄하는 권한을 가진 미 연방정부의 핵심 권력기관이다.)

“대선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오바마의 하버드 로스쿨 동창인 줄리어스 제나초우스키를 만난 이후 그는 나의 친구이자 멘토가 됐다. 오바마가 대통령 당선 후 줄리어스를 FCC 위원장에 지명했고, 줄리어스는 내게 함께 일하자고 했다. 새로운 법이나 규정을 통해 소비자 보호를 강화하고, 이와 관련된 새로운 정책 목표를 위원장에게 제시하는 게 내 역할이다.”

● 2008년 캘리포니아주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하려 했다고 들었다.

“그 지역 톰 랜토스 의원이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 주변 동료들이 나를 격려했다. 주목받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론 늘 선출직 공직에 한국계가 더 많이 진출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예를 들어 버지니아텍 조승희 총기난사 사건이 났을 때나 LPGA(여자프로골프협회)에서 영어만 사용해야 한다고 했을 때 한국인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리더가 없었다. 그래서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나는 내 학력과 경력이 그 자리에 적합할 수 있다고 봤지만 사람들은 서바이버 우승자라는 점만 부각시켰다. 또 당시 나는 지금의 아내 소피와 데이트 중이었다.”(웃음)

● 지금은 어떤가, FCC 부국장 자리가 공직의 끝은 아닐 텐데.

“확고한 그림은 없다. 그러나 선출직 공직은 좋은 아버지와 남편이 되려는 내 희망과 양립할 수 없을 것 같다. 일단 임명직 공직에서 계속해서 꿈을 이어가고 싶다. 희망을 말한다면 한국계 최초의 내각 멤버(장관)는 어떤가. 나는 한국 문화와 한국 사회에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미국 사회의 리더로 성장해 한국 사회와 한국계 미국 사회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

● 최초의 한국계 미국 대통령은 어떤가.

“한국계 미국 대통령의 탄생을 보는 일은 정말 흥분될 거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나는 사실 미국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고 싶다. 사물을 전체적으로 폭넓게 파악하는 시각, 정치적 감각, 법률적 지식, 사람들과의 소통 능력 등을 감안하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같다.”

● 리더가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은 .

“지혜, 자신감, 성숙함, 결단력, 강인함, 카리스마. 리더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철저한 자기 인식이다. 나는 훌륭한 리더들에게서 예외 없이 끊임없는 자기 평가와 자기 개선 노력을 지켜봤다. 둘째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이해심이다. 나는 매우 똑똑하고 야심찬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북돋워주는 능력이 있었다.”

●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조언해 줄 말이 있는가.

“이 세상에는 김연아나 타이거 우즈식 성공이 있다. 좁고 깊게 한 우물을 파는 방식이다. 그러나 다양한 분야를 폭넓게 경험해서 실력을 쌓아가는 권율식 성공도 있다. 아버지께서 ‘나는 30년 동안 한 회사를 다녔는데 너는 왜 그렇게 자주 옮기냐’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다양한 각도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갈수록 더욱 더 긴요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워싱턴 DC의 의사당 건물을 바라보며 걷다가 그에게 “지금까지 가장 뼈아픈 실수가 뭐냐”고 물었다. 그는 머뭇거리며 “어, 많죠”라고 말할 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예상대로였다. 권율은 놀라울 정도의 절제력으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다.

2 리더십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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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족과 사랑
TV속 나를 보고 혹시 게이?
그렇게 물은 그녀와 사랑했다


권율은 1975년 한인들이 많이 사는 뉴욕 퀸스 플러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아버지 권영현(70)씨가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녔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캘리포니아주의 석유 회사에 직장을 갖게 되면서 여섯 살의 권율도 함께 LA로 옮겼다.

다섯 살 위의 형 폴(한국이름 섭)도 스탠퍼드대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을 나온 실력파다. 두 형제는 모두 하버드대에도 합격했으나, 스탠퍼드가 보다 창의적인 곳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 부모님이 어떻게 키운 건가.

“아버지와 어머니(소선·66)는 깊은 사랑으로 우리들을 키웠지만 스타일은 정반대였다. ‘군기반장’ 아버지는 자식들이 공부에 집중해서 학교 성적이 뛰어나도록 밀어붙였다. 늘 내 학년보다 3년이나 앞선 교과서를 사들고 오셨다. 반면 어머니는 누구에게든 자상하고 친절한 분이셨다. 아버지에게는 규율·집중·근면을, 어머니에게는 타인과의 따뜻한 교감을 배웠다.”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9월 첫 출산을 앞둔 아름다운 부인 소피 탄(32)을 만났다.

소피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권율이 전한 러브스토리는 한 편의 시티콤이다. “아시아계 친구 브래드가 사람들을 한데 모아놓고 서바이버 프로그램을 봤다. 당시 내가 가장 멋지게 나올 때였다. TV를 보던 소피는 ‘저 사람도 동성연애자냐’고 물었다. 브래드가 동성연애자였기 때문이다. 아니라고 하자 소피는 농담 삼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수주 후 우리는 만났고, 사랑에 빠졌다.”

권율은 “외모만큼이나 소피의 마음이 아름다웠다”며 “서바이버 출연 후 만난 어떤 여자들과 달리 소피는 명성과 돈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UC 버클리대를 나온 소피는 미 연방 보건복지부에서 소수인종의 건강지원 업무를 맡고 있다.

4 서바이버 도전기

한인도 리더 될 수 있다는걸
미국에 보여주고 싶었다


2006년 12월 뉴질랜드의 쿡 아일랜드 섬. 미국 CBS방송 ‘서바이버(Survivor)’ 쇼의 배심원 9명이 우승자 선발을 앞두고 권율씨에게 ‘최후의 변(辯)’을 주문했다. “어릴 적부터 TV 속의 황인종은 늘 웃음거리로 그려졌어요. 난 승자가 되면 아시아인의 저력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권씨의 발언에 출연자들은 숙연해졌다. 이윽고 진행자가 쪽지를 폈다. 우승자 ‘권율’. 복받치는 감격에 권씨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는 맞수인 히스패닉계 웨이터인 오스카 오지 루스와 박빙의 승부 끝에 배심원 투표에서 5대4로 ‘최후의 월계관’을 거머쥐었다.

이 게임은 ‘인종 대결’로도 불렸다. 아시아·백인·흑인·라틴계가 5명씩 부족을 이뤄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만 들고 39일간의 생존 싸움에 뛰어들었다. 권씨가 속한 푸카 부족은 한국계 이설희(변호사)씨와 필리핀·베트남계 등으로 이뤄졌다.

20명의 출연진은 5만 명의 지원자에서 인터뷰와 체력·심리 검사를 거쳐 뽑혔다. 의대생·부동산업자·경찰·영업사원 등이 망라됐다. 참가자들은 통나무 매달리기부터 불 피우기, 퍼즐 풀기까지 체력과 지략을 요구하는 게임을 치렀다. 패배하면 팀원이 하나둘 탈락하면서 ‘최후의 1인’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상대를 떨어뜨리고 내가 남아야 하는 게임. 승패는 인간관계가 좌우한다. 권씨는 j와의 인터뷰에서 “저의 기본 전략은 출연자들과의 감정이입을 통해 친밀한 신뢰를 쌓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리더십 뿌리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출연자들이 제게 조언을 구하기 시작하면서 엄청난 정보를 얻게 됐고 사람들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지요.”

권씨는 그간 닦아 온 ‘지식 내공’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시 수많은 게임 이론과 수학적 방법도 구사했어요. 대학교에서 게임이론과 언어학·수학·사회심리학을 배웠고, 우리 팀이 앞서갈 최선의 전략은 어떤 것인지 계산을 했지요. 종이나 연필이 없어 머릿속으로 답을 구하느라 여러 날 밤을 지새워야 했고요.”

쇼가 끝난 뒤엔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권씨를 초청해 지난 3년간 요원들에게 사람들과 어떻게 교감하고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가르치게 했다.

권씨는 “당시 친구 한 명이 아시아계 미국인의 전형을 찾던 서바이버 프로듀서에게 저를 추천했어요. 그런데 그 전형이란 게 뭔지 아세요? 영어 한마디 못하면서 쿵후에 미친 사람이거나, 공부만 죽어라고 하는 괴짜였어요. 인터뷰를 했더니 후자처럼 보이라고 양복 입고 안경을 쓰라는 거예요.”

그런데도 출연키로 마음을 굳힌 이유는 뭘까. 권씨는 “오히려 그래서 나간 거예요. 그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아시아계 미국인들, 특히 한국계 미국인들이 얼간이나 괴짜만 있는 게 아니라 남과 협력할 줄도 알고, 특히 남을 리드할 줄 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

From j

2호의 프런트 페이지를 장식한 권율씨는 참 반듯한 사람이었습니다. j팀의 박현영 기자가 그와 사전에 수차례의 연락 e-메일을 주고 받았지요. 권율씨는 박 기자를 남자로 지레 짐작했는지 줄곧 ‘Dear Mr. Park’으로 호칭했습니다. 박 기자가 추후 “난 여기자”라고 말해주자 그가 이런 e-메일을 보내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깊이 사과드립니다. 저도 이런 적이 있어요. 미국 사람들은 제 이름인 ‘율(Yul)’에 익숙지 않아 때때로 제게 ‘Ms. Kwon’이나 ‘Mrs. Kwon’이라고 편지를 보내옵니다. 글쎄 제 사진이 붙어 있는 버지니아 운전면허증에까지 ‘여성(Female)’이라고 기재된 사실이 있었습니다. 면허 따러 가던 날 원피스를 입고 갔었나 봅니다.” 성의 있는 대응과 설명, 유머에 그가 리더십의 게임인 서바이버에서 우승한 까닭을 짐작했습니다. 그에게서 사람에 대한 ‘정성’을 배웁니다.

가수 조용필씨와의 1시간 30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난 뒤 박종근 사진기자가 별도의 사진 촬영을 요청했습니다. 윗옷을 벗어젖힌 조용필씨가 연습실로 가더니 실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30분간의 추가 촬영이 끝난 뒤 4, 5면에 걸친 ‘작품’ 사진이 탄생했습니다. 지켜보던 저도 힘든 터에 보여준 거장 조용필씨의 ‘겸손’과 ‘열정’에서 다시 배웠습니다. ‘열정’과 ‘정성’, 그리고 ‘겸손’으로 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참 는 중앙일보의 영문 머리글자 j를 토요일 편히 쉬는 사람 모습으로 디자인한 것입니다.

최훈 중앙일보 j 에디터

2010년 5월 8일 토요일

잠실 야구장 예매 Tip

2. 티켓가격

 

< 엘지 경기 >

 

< 두산 경기 >

 

 

 

 3. 예매

 

좌석별 특성

 

 < 중앙석 >

진골 아니면 앉기 힘들다.

보통 기자, 연예인, 선수들의 가족, 기업 접대용으로 팔리므로 평민들은 표 구경하기도 힘들다.

경호원도 지키고 있다눈....

 

 < 테이블석(일명 끌레도르/로티보이석) >

요긴 가족들끼리 도시락 싸서 가믄 좋다.  

장내 정리하는 시간에 두산 경기때 끌레도르 아이스크림 제공.

너무 조용해서 응원하기 뻘쭘하다는 단점이....

 

 < 블루 지정석 >

편안하고 조용하고 진지하고 실감나게 야구를 보고싶을 때 110, 212 / 113, 215 추천.

앞줄 가운데(107~109 / 114~116) 앉으면 덕아웃 들락거리는 선수들을 바로 코앞에서 볼 수 있다.

대신 티켓 오픈시간 잘 봐뒀다가 컴터 앞에 딱 대기하고 광클 필수~!!

 

 < 레드 지정석 >

보통 일반 야구 광팬들이 제일 선호하는 자리.

105, 106/ 117, 118은 선수들이 잘 보이고 파울볼 득템 유리.

응원단상 바로 앞자리 206,207 / 220, 221은 어마어마한 혜택이...

이벤트, TV 출연, 키스타임, 치어리더 언냐와의 혼연일체 익사이팅한 응원 분위기....

난 치어리더들이 시야를 가려서 별로 안좋아하지만

골팬들이 제일 선호하고 동호회 단관도 자주 있어서 여기도 광클 필수!

 

 < 내야석 >

중앙석 바로 뒤나 206,207 / 220, 221 바로 뒷쪽 자리는 레드 지정석 보다 나을수도 있다. 가격대비 만족도 최고!!

하지만 선착순이어서 인기있는 경기는 최소 2~3시간 전에 가서 달리기 잘해야 좋은데 앉을 수 있다.

기다리기 매우 지루하고 배고프므로 먹을거 제일 많이 싸가야 하고, 돗자리와 고스톱/카드도 빛나는 아이템 -_ㅡ#

 

 < 외야석 >

솔직히 야구 잘 안보인다.

보통 잿밥에 관심 많은 분들이 가는 곳.... 파울볼, 홈런볼이 제일 많이 날아가는 자리....

라이트 기둥 아래는 늘 신문지 깔고 술판 벌이는 아저씨들 꼭 있다.

 

http://blog.naver.com/02minjoo?Redirect=Log&logNo=110066880277

2010년 5월 5일 수요일

르네마그리트


열린문화 > 마음미술관 > 이건 파이프가 아니다 -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출처 : www.amind.co.kr



비폭력유목민 :: 르네 마그리트 - Connivance

이미지출처 : luminal.pe.kr



리버룸님의 블로그

이미지출처 : blog.joins.com



해피포터의 행복한 프로그래밍 : 르네 마그리트 탄생 110주년

이미지출처 : chez.egloos.com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 르네 마그리트, 개인적 가치, 1952

이미지출처 : lepremiermai.tistory.com



찾지말고 통 하자!

이미지출처 : tong.nate.com



whatis___title :: 낯익은 것들의 낯설음 -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출처 : blog.jinbo.net


http://blog.naver.com/k07yhss/140101685100

"Life obliges me to do something, so I paint."
"인생은 내게 무언가 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린다"

"Art evokes the mystery without which the world would not exist."
"예술은 미스터리를 만들어낸다. 미스터리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My painting is visible images which conceal nothing;
they evoke mystery and, indeed, when one sees one of my pictures,
one asks oneself this simple question 'What does that mean'?
It does not mean anything, because mystery means nothing either, it is unknowable."
"내 작품들은 아무런 상징도 없는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은 미스터리를 만들어내고, 그렇기에 누군가가 내 그림을 한 점 본다면
'이게 무슨 의미지? 하고 물을 것이다. 그건(내 작품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미스터리 도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알 수 없을 뿐이다."

"Everything we wee hides another thing,
we always want to see what is hidden by what we see."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보고 싶어한다."

2010년 5월 2일 일요일

삼성도 그만두고 간다는 신의 직장

거래소 평균 연봉 1억…대학교직원 갈수록 인기
공공기관 보수가 전체적으로 다소 줄었다지만, 몇몇 기관들은 여전히 `신의 직장`이었다. 한국거래소는 직원 평균 연봉이 1억원을 넘어서며 공공기관 중 가장 높았고 기관장 연봉도 2위와 큰 격차를 보이며 1위를 차지했다.

직원 평균 연봉은 한국거래소(1억608만원)에 이어 한국투자공사(9,795만원) 코스콤(9,380만원) 한국예탁결제원(9,311만원) 등 금융 공기업이 상위 1~4위를 휩쓸었다. 특히 한국투자공사 직원들은 지난해 처음 성과급을 받으며 연봉 증가율이 42%에 달했다.

2008년 연봉 1위였던 한국산업은행은 3.5% 줄어든 8,943만원으로 6위에 머물렀다. 한국전기연구원(9,183만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8,453만원) 한국원자력연구원(8,364만원) 한국해양수산개발원(8,317만원) 등 연구기관들도 상위권에 포진했다.

기관장 연봉에서는 한국거래소가 2008년보다 19.2% 줄었으나 6억4,844만원으로 여전히 1위였고, 한국수출입은행(4억8,444억원) 중소기업은행(4억8,394억원) 한국투자공사(4억6,748억원) 한국산업은행(4억6,190억원) 등의 순이었다.

최근에는 공기업보다 `한수 위`인 직장으로 대학 교직원이 떠오르고 있다.

정년 보장(57~62세)과 퇴직 후 사학연금, 방학 중 단축근무, 대학원 진학 혜택 등 안정적이면서 자기계발과 노후보장이 된다는 장점 때문에 `신(神)도 모르는 직장`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초봉도 3500만~4000만원 수준으로 웬만한 대기업 못지 않다.

이 때문에 대학 교직원은 채용 경쟁률이 수백대 1에 달한다. 연세대가 작년 10월에 실시한 교직원 채용에는 3명 모집에 900명(300대1)이 지원했고 한양대도 2008년 3월 교직원 4명을 채용하는데 1234명(309대1)이 지원했다. 서울대도 지난해 교직원 1명 뽑는데 209명이 몰렸다.

대학 교직원은 특히 잦은 야근과 격무에 시달리면서 정년 보장도 안 되는 다른 직장인들 사이에서 이직(移職)을 원하는 직장 1순위이기도 하다. 서울의 한 사립대 교직원인 김 모씨(32)는 대학 졸업 후 삼성에 입사했지만 2년 만에 그만두고 교직원이 됐다.

[김용영 기자]